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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을 보는 시선

예맨 피난민들의 지위 부여 문제로 떠들석하다. 피난민들이 한국에 머무는 데 우려를 표하는 말도 많다. 그 중 상당수가 다른 것 보다도 무슬림이나 범죄와 관련이 많았던 것 같다. 한국도 현 미국 상황과 마찬가지로 실제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이민 자체의 문제 보다는 “누가 이민을 오느냐”가 주 관심사이다. 전에 트럼프 대통령이 한 말 중 이런게 있었다. “Having all these people from shithole countries come here,””we should have more people from Norway.” 소위 가난한 나라들 말고 노르웨이처럼 잘 사는 사람들이 오기를 원한 것이다. 아무리 평생 그 사람들 볼 일 없다고 해도 당연히 교육 더 잘 받고 범죄 저지를 확률이 적은 사람이 이주 오는게 좋지 않겠는가?

사실 이민 문제를 보는 극단적인 시선이 많다. 이분법적으로 봤을때, “불쌍하니 도와야 한다”와 “범죄자를 들이는 길이다” 식이다. 두 시각 모두 연민과 혐오라는 강한 감정이 들어간다. 어느 두 사람이 결혼해 부부가 되어 산다고 생각했을 때 사랑이라는 감정만이 부부관계를 이끌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거다. 10년 20년 한 사람 혹은 여러사람과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분명 다른게 필요하다. 나는 그게 공감이라고 생각한다. 피난민에 대한 공감 뿐만이 아니라, 이민을 환영하는 사람과 환영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도 공감이 필요하다.

이주/이민에 대한 정의는 해석에 따라 다를 수 있는데, 유엔은 1년 이상이라는 기간을 충족해야 이주라고 정의한다. 이 기준으로 해외에 나가있는 한국인은 2015년 기준 2,350,000명으로 인구 수의 약 5%에 해당한다. 게다가 요즘은 청년 취업난이 심해 정부도 해외취업을 적극 권장하는 추세이다. 즉 해외로의 경제적 이민을 권장하고 있다는 거다. 해외에 취업하는게 외국에 “실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거다. 그보다는 “능력”이라고 여겨지기 마련이다. 참고로 한국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의 수는 같은 해 1,330,000명이었다. 영어강사야 특화된 직업이기에 예외지만, 한국말을 완벽히 못하는 외국인이 한국 회사에서 취업하기는 정말로 하늘의 별따기다. 안타까워하며 트럼프의 짝사랑 노르웨이로 다시 돌아가는 친구도 있었다. 예맨 피난민 관련 뉴스를 보다 피난민을 “난민이 아닌 경제적 이민자”라고 보며 반대하는 사람을 보았다. 사실 협약이나 허가 없이는 한국으로 경제적 이민 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울 뿐더러 한국은 난민 지위도 쉽게 내주지 않기 때문에 이민자가 싫다면 어느 정도 국가에 맞겨도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민자가 아니라 출신 국가이기때문에 이런 주장은 무용지물이다. 어쩌다 한국은 무슬림을 불신하게 됐고 가난한 나라의 국민들은 불법행위를 더많이 할거라 믿게 됐을까?

한국은 어쩌면 개인주의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주관성보다는 객관성이 더 설득력을 가지는데, 중요한 건 객관성을 적용하는 건 선택적이라는 것이다. 개인의 주관성을 무시하고 객관성에 의지하려는 태도는 자기 자신보다는 남에게 있어 더 빈번하게 나타난다.

최근 KBS의 ‘안녕하세요’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프로그램의 컨셉은, 두 파티의 이해관계자가 등장해 고민을 이야기하고 함께 등장한 연예인 패널이 고민을 판단하는 식인 것 같다. 보면서 드는 생각이, 사소한 고민을 넘어 사회적 문제 혹은 정신건강의 문제를 늘 개인의 잣대로 평가한다는 것이었다. 이 프로그램뿐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도 이런 문제가 존재한다. ‘우울한 건 우울한 거고 잘못은 잘못’, 혹은 ‘상처를 받은 건 이해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나도 그런 경험 있지만 난 멀쩡한데’와 같은 논리의 잣대가 늘 개인의 책임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는 개인이 상황을 인식하는 방법은 다양할 수 있다는 주관성과 우리의 몸은 다양한 상황에 맞춰 다른 방향으로 대처한다는 사실 (coping mechanism) 을 완전히 무시한 경우이다. 더군다나 개인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개인의 일일 수는 없다. 개인에게 일어나는 일은 사회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수 있다. 하루 종일 초등생 자식을 학원에만 보내려는 부모의 행동은 개인보다는 공부와 성공을 중시하는 사회의 책임이 클 수 있고, 쇼핑 중독에 걸린 여성의 행동을 원인을 파악하지 않고 행동의 결과로 평가하는 것 또한 단편적 사회 교육의 결과이다. 사회학은 탄생과 죽음 사이의 모든 경험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교류의 산물이라 전제한다. 아무리 개인적으로 보일지라도 배경의 영향이 크다는 말이다.

몇 달 전 일본의 히키코모리에 대한 짧은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히키코모리는 밖에 안 나가고 집에만 있는 이들을 지칭하는 말인데, 등장인 중 많은 비율이 집에서 컴퓨터 게임만 하며 밖에 나가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이 내용만 들었을 때 ‘게임에 중독돼서 일도 안 하고 저렇게 집에만 있으니 부모가 얼마나 힘들겠어’라고 생각하며 혀를 차는 사람도 있겠다. 아마 ‘안녕하세요’의 패널은 이런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상처를 입고 사람과 사회를 불신하게 된 경우로 많은 이들이 정신 건강의 문제도 겪고 있다. 단순히 게임을 하느라 밖에 안 나가는 게 아니라, 집에 있으며 게임만이 안식처가 되게 때문이다. 이들이 사는 환경도 한국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사람들은 이들의 행동을 개인의 책임, 게으름으로 판단했고 그 결과 사회적으로 히키코모리 현상을 막는 것이 더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내 주변에는 정신 건강을 이유로 치료를 받고 있는 이들이 다수 있다. 내 주변에 특히 많은 건지, 내 앞에서 솔직한 건지, 나라의 차이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누군가 치료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결코 들은 적이 없다. 자살했다는 소리만 들을 뿐이다. 2018년 기준 한국의 자살 사망률은 100,000명당 28명꼴로 전 세계에서 4위이다. 이 때문인지 정부 기관 곳곳에 헬프라인과 상담에 대한 리플릿이 비치되어있었다. 안타까운 건, 자살을 막으려는 시도는 많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이를 더 깊게 인식하려는 시도는 적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내가 느낀 바로는, 한국에서는 대체적으로 정신건강에 대한 인식은 아주 피상적이거나 (예를 들어 스트레스를 풀려는 시도) 아주 극단적인 경우 (예를 들어 정신병원은 미친 사람이 가는 곳이고 정신상담은 낙인이라는 생각)이다. 다행히도 2018년부터는 정신과 의원급 기관에서 상담을 받을 경우 본인 부담금이 예전보다 줄어든다고 한다 (참고). 하지만 심리상담은 여전히 건강보험 적용이 안되는 듯 보인다 (참고). 치료에 대한 접근성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적인 인식 — 단순히 치료받는 행위를 받아들이는 것뿐만 아니라,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에 대한 인식과 인정 — 이 없이는 사회 문제만 더 키울 뿐이다. 그러다 보면 결국 이분법적인 논리만 더 강해지지 않을까.

차라리 검증된 — 단순히 증명서가 아닌 — 심리치료사나 정신과 의사, 덤으로 인류학자(이건 내 바람이지만)가 나와서 부가 설명이라도 했으면 도움도 되고 교육도 되는 기회가 있었을 텐데 말이다. 프로그램에 대한 피드백을 제공하고 싶었지만 KBS에 가입을 해야 했고 또 웹사이트 오류로 가입이 안돼 결국엔 내 몫을 다하지 못한 안타까움이 남는다. 이전에도 스쳐 지나가며 본 기억이 있다. 당시에도 사회의 책임을 개인이 혼자 해결하는 것이 옳다는 방향을 암시하는 내용이었는데, 이번 편만 그런 건가 하고 지나쳤었더랬다. 공동체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않고 사회의 문제를 과도하게 개인의 책임으로 물리는 것은 결국 아무런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개인에 불행만 안겨주는 결과를 낳는다. 이런 문제에 대한 인식이 커졌으면 한다.